청동기 시대 시작은 대략 BC 2,00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 지 약 6,000년 만에 청동기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이 시기에는 청동기(Bronze)가 쓰여지던 시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로 사용되었던 도구의 재료가 청동기인 것은 아닙니다. 단지, 청동기로 만든 도구가 사용되었던 시기였던 것이죠.
청동기 시대 주요 재료
청동기 시대의 주요 재료는 여전히 돌입니다. 돌이 청동기보다 훨씬 더 단단했기 때문이죠. 심지어 농사를 지을 때에도 여전히 돌을 이용했습니다. 따라서 인류가 농사를 시작한 이후로 청동기 농기구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신석기 시대의 농기구와 차이점을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정교함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신석기 시대에도 농기구를 돌을 갈아서 만들었지만, 청동기 시대에는 더욱 정교하게 갈아서 벼농사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청동기 대표 농기구인 반달돌칼과 신석기 대표 농기구인 돌낫을 비교해보면 쉽게 판단이 되실겁니다.
신석기 시대에 사용했던 돌낫의 그림을 못보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셔서 한번 확인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벼농사 뿐만 아니라, 신석기 시대에 재배하지 않던 보리와 콩까지 재배를 시작했는데요. 이런 농사의 발전으로 잉여생산물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잉여생산물이 생겼다는 것은 힘으로 뺏을 ‘재산’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죠. 이때부터 다른 사람의 잉여생산물을 뺏는 정복 활동이 시작됩니다.
잉여생산물을 뺏는 정복활동은 식량을 뺏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유재산의 차이가 생기고, 계급이 자연스럽게 나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청동기 시대에 지배 계급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할 때 비파형 동검과 거친무늬거울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비파형 동검은 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정복 활동의 증거가 되고, 거친무늬거울은 는 장신구이므로 재산의 차이로 발생하는 계급을 증명하는 것이죠.
주의 변화
이런 정복 활동으로 인류의 주거 문화도 변화가 생깁니다. 신석기 시대에는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강이나 해변 근처에서 거주했지만, 청동기 시대에는 공격을 방어하기 쉬운 야산이나 구릉으로 이동을 합니다. 또한 방어 시설로 환호나 목책을 설치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유적지는 충남 부여 송국리 유적지입니다.
또한 잉여생산물 덕분에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낳은 아이 수에 따라 움집 크기도 다양하게 지었으며, 인원이 많은 집은 화덕을 한쪽 벽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신석기 시대에는 열효율을 중요시 하여 중앙에 두었지만, 청동기 시대에는 사람이 많이 짐에 따라 공간 효율을 더 중요시 여기게 된 것이죠.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는 고조선으로 보고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를 대략 BC 2,000년에 시작이고, 우리나라 고조선을 BC 2,333년 건국으로 보고 있으니 대충 맞기는 합니다. 다만, 우리나라 고조선이 BC 2,333년 건국되었다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고조선이 BC 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보는 이유는 AD 1281년(고려 충렬왕)에 일연 스님이 편찬한 삼국 유사에 “고조선 건국은 BC 2,333년이다.”라고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연 스님은 3,500년 전 일을 어떻게 안 것일까요?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를 편찬할 때, 중국 역사서인 위서, 고기, 당서 등을 참고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역사서도 빨라야 6세기는 되어야 편찬되었다는 것이죠. 즉, 신뢰할만한 사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고조선이 저 시기에 건국되었으리 확실한 유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죠.
그래서 청동기 시대를 공부할 때, 항상 언급되는 것이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 유물입니다. 우리가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를 갖고 독립적인 국가를 만들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대표적인 유물이 비파형 동검, 탁자형 고인돌, 거친무늬 거울, 미송리식 토기입니다.
위 네 가지 유물은 시험 문제 단골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틀리면, 정말 한국사 공부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쟁점이므로 꼭 암기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앞 글자만 따서 ‘비탁거미’로 꼭 암기하시고 넘어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