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저 건국 시기는 늦어도 BC 3세기입니다. 생각보다 매우 빨리 건국된 나라이죠. 하지만 연맹 왕국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군장 국가에서 멸망했는데요. 그렇다면 옥저는 왜 ‘고조선도 이루었던 연맹 왕국’을 만들지 못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그 이유부터 다른 세부 시험 논점까지 모두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옥저 건국
옥저의 건국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BC 3세기 이전에는 건국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위치는 함경도 동해안인데, 고구려의 개마대산 동쪽이지요. 토지가 비옥하고 바다도 끼고 있어 어물과 소금이 풍부했는데, 고구려와 인접한 탓에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거의 다 빼앗겼죠.
옥저 고구려 관계

옥저와 고구려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비슷한 조건에서 성장했습니다. 위 지도를 보더라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고구려는 주변을 통합한 연맹 왕국으로 발돋움하며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반면, 옥저는 군장국가 수준에서 정체되며 외세에 쉽게 침탈당하는 구조로 이어졌습니다.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인접국 간 교류가 아닌, 고구려의 반복적인 약탈과 장기적인 복속 과정으로 이어졌죠. 그 배경에는 다섯 가지 구조적 차이가 존재합니다.
연맹왕국과 군장국가를 구분하지 못하시는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셔서 읽어보시기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정치 조직력에서의 격차
고구려는 부여계 혈통을 기반으로 조기부터 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 권력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고주몽의 건국 이후 ‘소노부’를 포함한 유력 씨족 간 연합이 체계화되었고, 이는 곧 왕권 강화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옥저는 다수의 군장이 지역을 분할하여 다스리는 군장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세 침입 시 중앙 지휘 체계가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직적인 대응이 어려웠고, 고구려의 압박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죠.
지형과 전략의 유불리
고구려는 산악 중심의 고지대를 중심으로 방어와 공격이 용이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반면 옥저는 동해안의 저지대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으며, 바다에 접한 평야는 방어에 매우 취약했습니다. 고구려는 개마고원을 넘어 쉽게 진입할 수 있었고, 동해안 지역의 자원을 손쉽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지리적 조건은 침입자에게는 유리했지만, 옥저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죠.
고구려의 반복적 약탈 전략
고구려는 초창기 주변 국가들을 병합하기보다는 반복적인 약탈을 통해 자원을 확보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특히 소금과 어물이 풍부한 옥저 지역은 경제적으로 매우 매력적인 대상이었습니다. 고구려는 이 지역을 정복하기보다, 군사력을 과시하고 일정 자원을 수탈한 후 물러나는 방식으로 점진적 통제권을 확보해 나갔습니다. 이는 옥저의 장기적 경제 기반을 무너뜨리고 내부 동요를 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내부 분열과 군장국가의 한계
옥저는 정치적으로 하나의 권력 중심이 없었으며, 각 지역의 군장들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구조였습니다. 이로 인해 외부의 공격이 들어올 경우, 전체적으로 결집하여 방어하지 못하고 군장 단위로 항복하거나 저항하는 모습이 반복되었습니다. 고구려는 이러한 분열을 이용해 각 군장을 개별적으로 압박하거나, 순차적으로 약탈하며 전체 지역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외교 고립과 연합 실패
고구려는 주변 국가와의 외교를 통해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부여와의 역사적 연계를 강조하며 정통성을 확보했고, 동예 등과도 전략적 관계를 유지하며 균형을 꾀했죠. 반면 옥저는 동맹이나 외부 연합을 형성하는 데에 실패했고, 고립된 채 고구려의 압박을 단독으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는 장기적인 방어전에서 결정적인 불리함으로 작용했습니다.
옥저 경제

옥저의 경제는 자연환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동해안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십분 활용한 해양 자원 중심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요 경제 기반은 어업과 소금 생산이었고, 이 자원들은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해양 자원을 기반으로 한 경제 구조
옥저는 동해에 접해 있는 지리적 이점을 적극 활용하여, 어업과 천일염 생산을 주요 생업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소금과 어물은 옥저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생산품이었으며, 내륙 지역인 고구려와는 차별화된 자원이었죠. 당시에는 냉장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소금은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식량 보존과 생존에 직결된 필수 자원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단발적인 정복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옥저를 약탈하거나 간접 통제하는 방식으로 소금과 어물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고구려와의 경제 종속 관계
고구려가 옥저를 반복적으로 침탈한 주된 이유는 바로 해양 자원 확보에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내륙 중심의 농경 국가였기 때문에, 바닷물로부터 얻는 천일염이나 해산물 자원이 매우 귀중했죠. 고구려는 일방적인 군사력만으로 옥저를 정복하지 않았고, 장기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특히 고구려 태조왕 이후 옥저는 실질적으로 복속되었으며, 이 시기부터는 소금과 어물이 체계적으로 고구려로 유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옥저가 독립적 경제 주체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는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옥저 풍습
민며느리제

옥저의 특이한 특징 첫 번째, 민며느리제입니다. 여자가 어렸을 때 남자 집으로 넘어가서 일을 하는데, 여자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 남자의 집에서 여자의 집에 예물을 치르고 혼인을 하는 풍습입니다. 엄연히 여자의 노동이 있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가 높은 예물을 치렀다고 합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민며느리제를 매매혼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서옥제는 매매혼이 아닌데, 둘을 비교하는 것이 출제 포인트입니다.
가족공동무덤

옥저의 특이한 특징 두 번째, 가족공동무덤입니다. 시체를 가매장 후 뼈를 추려 가족 공동 무덤인 목곽에 안치합니다. 목곽의 입구에는 쌀 항아리를 매달아 놓는 것이 특징입니다.
제천행사
옥저의 마지막 특징은 제천행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여는 영고, 고구려는 동맹, 삼한은 수릿날, 계절제, 심지어 동예도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거행했는데, 초기 여러 나라 중 옥저만 유일하게 제천행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문헌에 기록된 것이 없고, 북한에 위치하다 보니 더 이상 연구하기도 어려워서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옥저 동예
옥저 동예 관계
옥저와 동예는 고구려와 인접한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들로, 모두 군장국가 수준의 정치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조건에서 성립했지만 서로 경쟁하거나 대립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리적 분할을 통해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했으며, 고구려와의 관계 속에서 비슷한 운명을 겪게 되었습니다.
지리적 인접성과 문화적 유사성
옥저는 함경도 동해안 북부 지역, 동예는 함경도 남부와 강원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두 나라 모두 동해에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업과 해양 자원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회 구성도 비교적 단순한 혈연 중심의 부족 체계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두 국가는 문화적으로 유사한 배경을 공유했지만, 정치 체계와 종교 의식 등에서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고구려와의 유사한 복속 과정
옥저와 동예 모두 고구려의 성장과 함께 점차 압박을 받았으며, 최종적으로는 고구려에 복속되게 됩니다. 옥저는 AD 1세기 초 고구려 태조왕에게 병합된 후 실질적인 독립력을 상실했고, 동예 또한 고국천왕 때부터 정복되기 시작하여 5세기경 광개토대왕 시기 완전히 병합되었습니다. 이처럼 두 나라는 고구려의 확장 정책 속에서 전략적 자원 확보 대상이 되었고, 각기 다른 시기에 동일한 운명을 맞게 됩니다.
옥저 동예 차이점
두 나라는 비슷한 조건에서 형성되었지만, 문화적 풍습과 제도적 특징에서는 명확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 차이점은 한국사 시험에서도 자주 출제되는 구간으로, 이해보다 ‘정확한 구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천 행사 유무
동예는 매년 ‘무천(舞天)’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습니다. 이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과 노래로 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축제였으며, 동예의 정치적 통합과 정신적 연대감을 보여주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반면, 옥저는 문헌상 제천 행사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옥저가 중앙 집권적 구조를 갖추지 못했거나, 고구려와의 잦은 갈등으로 인해 그런 문화가 사라졌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혼인 제도
옥저는 민며느리제로 대표되는 매매혼 풍습을 가졌습니다. 어릴 적부터 여성이 남성의 집에 들어가 일을 돕고, 성인이 되면 예물을 지불하고 혼례를 올리는 방식이죠. 이에 비해 동예는 족외혼과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이었고, 구체적인 혼인 제도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옥저처럼 매매혼 중심의 제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례 방식
옥저는 세골장이라는 특이한 장례 문화를 지녔습니다. 시신을 일정 기간 땅에 묻은 뒤, 뼈만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에 안치하는 방식으로, 농경사회의 조상 숭배 개념이 반영된 풍습입니다. 반면 동예는 장례 방식에 대한 명확한 고유 풍습이 전해지지 않으며, 대부분 주변 국가들과 유사한 매장 방식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옥저 멸망
옥저는 AD 1세기, 고구려의 태조왕에 의해 복속되면서 실질적으로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AD 285년까지 존재했지만, 이후로는 고구려의 영향 아래 소멸해갑니다. 당시 옥저의 경제는 어물과 소금 중심이었으며, 고구려는 옥저의 경제적 자원을 수탈하며 그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옥저는 고구려에게 병합된 최초의 주변 국가로, 고구려의 대외 팽창 정책의 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심화 학습
옥저 뜻

‘옥저’라는 이름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고대 부족 사회의 정체성과 자연환경이 반영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한자로는 玉(옥)과 貯(저) 또는 저(저장하다·머물다의 뜻)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통해 여러 학설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옥(玉) 의미
‘옥(玉)’은 고대 동아시아에서 매우 귀중한 보석으로 여겨졌으며, 지위나 신분, 신성함을 상징하는 물질이었습니다. 옥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정치 권력과 종교 의식에서 사용되던 신성한 물품이었기 때문에, 지명에 ‘옥’이 들어간다는 것은 해당 지역이 예로부터 신성하거나 귀중한 자원이 나는 곳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옥저는 동해에 접해 있어, 실제로 소금과 어물 등 귀중한 자원이 풍부했던 지역이었죠.
저(貯) 또는 저(居) 의미
‘저’는 한자에 따라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저장할 저(貯)’로, 자원이 풍부하여 축적이 가능한 땅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설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머물 저(居)’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사람들이 정착해 살기 적합한 비옥한 평야 지대라는 뜻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실제로 옥저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농사와 어업이 모두 가능했던 자급자족형 경제 기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의 다양한 해석
일부 역사학자들은 ‘옥저’라는 명칭이 부여 계통의 언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도 제시합니다. 이는 옥저가 부여계 부족과 일정한 문화적 연결고리를 가졌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설에서는 고조선계 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며, 고조선이 멸망한 후 그 남은 세력이 동북 방면으로 이주하면서 ‘옥저’라는 지명을 형성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3옥저설과 2옥저설
옥저는 단일 국가가 아닌, 지역적 세력으로 분화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2옥저설(남옥저·북옥저)과 3옥저설(남옥저·북옥저·동옥저)로 나뉘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삼국지》 동이전과 《후한서》에서는 북옥저를 중심으로 한 기록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남옥저는 북옥저에 대한 설명 중 단 한 번만 언급되어 있어, 이를 별도의 세력으로 보느냐 여부에 따라 견해가 갈립니다. 동옥저는 남옥저와 동일한 집단으로 보기도 하고, 별개로 보기도 하며, 이는 옥저가 느슨한 연합체 혹은 정치 공동체였음을 시사합니다.
옥저와 한사군의 관계
옥저는 위만조선의 붕괴 이후, 현도군과 낙랑군에 차례로 편입되며 한사군 체제 하에 놓이게 됩니다. 특히 한나라가 현도군을 고구려의 침입으로 인해 서쪽으로 이전한 후, 옥저는 낙랑군 동부도위의 관할 아래 들어가게 되었죠. 그러나 후한 광무제가 동부도위를 폐지하면서, 옥저는 다시 자치적 통치 구조를 회복합니다. 이후 고구려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다시 옥저를 흡수하게 되는데, 이러한 직접 지배 → 간접 자치 → 복속의 변화는 고대 동북아시아의 국제 질서 속에서 옥저의 정치적 위치를 잘 보여줍니다.
중국 화폐와 청동기 유물의 출토
옥저 유적지에서는 전한 오수전, 전국시대 위나라 화폐, 그리고 중국 청동 무기들이 다수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라, 모피·해산물과의 교역 대가로 수입된 물품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특히 옥저 유적에서는 중국 화폐가 담긴 항아리가 통째로 발견되기도 했으며, 이는 상업 활동이 존재했음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따라서 옥저는 자급자족에만 머무르지 않고, 국제적 교류를 통해 중국 문물까지 유입한 복합 경제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루(溝婁)’라는 명칭의 의미
옥저의 또 다른 명칭 중 하나인 ‘매구루(買溝婁)’의 ‘구루(溝婁)’는, 《삼국지》 동이전과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고유 지명입니다. 이 단어는 ‘홀(忽)’, ‘골’과 어원이 같으며, 현대 한국어의 ‘골짜기’나 ‘골’이라는 지명 단어와도 연결됩니다. 본래는 ‘사람이 사는 곳’ 혹은 ‘성읍’을 뜻하는 고대 한국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는 옥저가 도시적 성격을 일부 띤 정착 공동체였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옥저인의 군사력 – 보병전 특화
《삼국지》와 《후한서》에서는 공통적으로 옥저가 보병전에 능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단순히 고구려에게 일방적으로 침탈당한 수동적 국가가 아니라, 방어력과 전투 능력을 갖춘 군사 조직이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해안 평야 지역이라는 취약한 지형에서도 옥저가 한동안 고구려와 독립된 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동성이 높은 보병 전투력 덕분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주 묻는 질문(FAQ)
옥저는 언제 멸망했나요?
옥저는 공식적으로는 AD 285년까지 존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AD 1세기 초 고구려 태조왕에게 복속되면서 독립적인 정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이후 고구려의 경제적·군사적 지배를 받으며 점차 통합되었죠.
옥저는 왜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했나요?
옥저는 군장국가 체제를 유지하며 중앙 집권적 정치 조직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분권화된 구조와 지리적 취약성, 외교 고립 등이 연맹 왕국으로의 발전을 가로막았습니다.
옥저의 민며느리제는 어떤 혼인 풍습인가요?
여성이 어릴 때 남성 집에 들어가 가사노동을 하며 성장하다가, 성인이 되면 남성 측에서 예물을 주고 정식으로 혼인을 성립하는 제도입니다. 경제적 대가가 뚜렷하기 때문에 매매혼의 성격을 지녔다고 평가받습니다.
옥저와 동예는 무엇이 달랐나요?
제천 행사의 유무, 혼인 제도, 장례 풍습 등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동예는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거행했고, 혼인은 족외혼 중심이었습니다. 반면 옥저는 제천 행사가 없고, 민며느리제라는 매매혼 풍습이 존재했죠.
옥저에서 중국 화폐가 발견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옥저는 해산물과 모피 등을 통해 중국과 교류했고, 그 대가로 오수전 등 화폐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옥저가 단순한 자급자족 사회를 넘어서 국제 교역도 일부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